(출처 : 포이에시스 다음 카페. 모미나)

플레이백 시어터 (Playback Theatre)는

‘플레이백 시어터'는 관객의 이야기를 움직임과 음악으로 형상화하는 즉흥예술의 장입니다. 모든 것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며, 나의 이야기라면 어떤 이야기든 초대됩니다. 나의 경험이 예술로 반영되는 공감의 무대입니다. 이 예술적 형상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적인 수용과 공감, 새로운 발견과 통찰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플레이백 시어터는 일상적 삶이 담기는 예술,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술, 소통과 연결의 예술을 꿈꿉니다. 극장이 아니라도 둘러앉아 움직일 수 있는 넓은 공간만 있다면, ‘플레이백 시어터'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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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미리 준비된 대본은 없으며, 현장에서 관객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공연의 주제가 된다.

물론 현대의 관객이 무대에 올라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진행자의 안내에 기대어 이 연극이 관객의 편에서 관객을 끌어안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조금만 맛보게 되면, 이내 자신의,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무대로 초대된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대기하고 있던 배우들은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그 이야기를 지금-여기(here and now)에 형상화한다. 이제부터 그것은 과거 사건의 단순한 재연이 아니며 새로운 형태로 주인공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관객 모두는 배우들의 즉흥연기와 악사의 즉흥 연주를 따라 이야기를 경험함으로써 공유한다. 이 경험은 새로운 주인공(teller)을 낳고 이야기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우리는 정성껏 듣고 함께 경험하며 우리들만의 잔치를 이어간다. 먼 옛날, 커다란 달 아래 불 피우고 둘러모인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이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었듯, 우리들 삶의 웃음과 눈물을 담아 우리들의 신화를 엮는다.

마법같이 펼쳐지는

플레이백 시어터를 경험한 관객들은 종종 이 연극이 ‘마치 마법 같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플레이백보다 현란하고 마법 같은 볼거리를 선사하는 공연은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이러한 감회를 전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미리 연습된 바도, 어떠한 사전 협의도 없이 이야기를 들은 즉시 배우들이 사건을 눈앞에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 즉흥적 사건은 우리를 흥분시킨다.

그러나 이 진한 흥의 더욱 근본적인 요인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일 것이다. 피와 아를 가르는 것은 이미 잘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존중하느냐에 따른다. 이제껏 모르던 사람이거나 다른 문화의 이야기라도 맞대면의 소통을 거쳐 내 이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이 이 공동체적 연극의 매력이다. 또한 이 즉흥 공연을 가능케 하는 것은 관객에게나 배우에게나 서로에 대한 수용과 존중과 협력인 바, 이 포용의 에너지가 현장의 흥을 더욱 농밀하게 만드는 것이다. 날세운 경쟁과 평가로 가득한 세상살이 한 편에서 플레이백 씨어터가 만드는 공감과 포용의 위력은 단지 쉼표 이상의 의미, 그 자체로 치유력을 발휘한다.

어떤 이야기든 그것이 삶이라면

무대에 초대되는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렸을 적 기억, 어젯밤에 일어난 일, 꿈,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불행한 일이든 행복한 일이든, 어느 누구도 평가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다만 귀기울여 듣고 그의 일부가 되어 지금 여기에 되살려 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대를 향해 열지어 앉은 전형적 극장에서 관객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옆 자리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자,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옆에 있는 사람과 인사를 나눠 보시겠어요?

자기 소개도 좋고 무엇이든 자기 이야기를 한가지씩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나요?”

“당신의 이름은?”

플레이백 시어터 공연 시작 단계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견 어색하고 낯선 이 인사는 이 연극이 이방인이 아니라 이웃의 연극임을 상기시키는 장치이다.

물론 극장에 와서 옆 자리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갖추어야 할 난데없는 미덕은 아니다. 이는 극장 문화가 아니라 소통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처음 접하는 관객은 이 의례를 조금쯤 불편하고 어색해하기도 한다. 낯선 것은 불편하다. 그만큼 현대를 사는 우리가 소통에 인색하고 서로를 타자화하는데 길들여져 있음일 뿐이다.

플레이백 시어터는 ‘예술적 사건’(artistic even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는 공연’이라기보다 경험하는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예술가에 의해 창조된 작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관객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집단적 실천 행위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실존으로 만난 내가 누구이고 당신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플레이백 시어터의 무대

이 무대는 언제나 단순하다. 무대 정면 안쪽에 박스가 놓인다. 이 박스들은 배우들의 대기석이자 공연 중에 소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박스 오른편에는 여러 가지 악기와 함께 악사의 자리가 있다. 악사는 즉흥 연주로 배우들과 함께 관객의 이야기를 재창조한다. 박스 왼편에 색색의 천을 걸어둔다. 천들은 공연 소품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플레이백 시어터의 제의적 분위기를 만드는 관습적인 무대장식이기도 하다. 더 왼 편으로는 무대와 객석의 중간 쯤에 두 개의 의자를 나란히 두는데 하나는 관객과 인터뷰를 하며 관객을 무대로 초대할 진행자(conductor)의 자리이다. 다른 하나의 빈 의자는 이야기 주인공(teller)의 자리이다. 공연 현장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빈 의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공연장 안에서 관객, 진행자와 이야기 주인공, 배우, 악사는 거의 원형으로 서로 마주보는 구조를 가지며, 관계와 소통을 중요시하는 이 연극의 현장에 모두가 동등하게 동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나눔을 위한 마당

공연장소는 반드시 고정된 극장 공간일 필요가 없다. 공연용 극장도 좋고 그저 전면이 깨끗한 방이어도 좋다.

현대의 공연 시스템에서 화려한 장치와 효과에 둘러싸인 볼거리는 갈수록 탄성을 자아낼 만한 기술을 확보해 가지만, 그 맞은편에서 관객은 수동적 존재로 작아져 간다. 이야기와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진대, 공동체적 연희를 잃어가는 도시에서 우리들은 소외되고 고독하다. 관객을 무대의, 놀이의 주인공으로 다시 되돌리고자 하는 플레이백 시어터의 공간은 전통 연희의 마당과 닮았다.

구조물이 관객을 압도하지 않으며, 객석에서 무대로 언제든 쉽게 들고 날 수 있으며, 때로는 하는 자와 보는 자가 뒤섞일 수도 있는, 하여 자리에 모인 모두가 환영받고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장을 펼치는 것이 플레이백 시어터가 추구하는 공간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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