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법을 배우기(책) 요약(파일 첨부)

이론이야기.

책 제목 : 배우는 법을 배우기

저자 : 시어도어다이먼

들어가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 나아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물론, 바꾸고 싶다는 의지를 가졌다는 전제하에). 그런 습관이 쌓이고 쌓여서 미처 자신이 이런 습관이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때. 그것을 바꾸는 연습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에서는 사람의 정신과 몸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둔 ‘배움’에 대한 접근 방식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저는 ‘배움’을 일종의 변화 혹은 성장으로 보았고, 이를 서로 비교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한 힌트”를 얻고자 했습니다.

0. 들어가는 말

(p14~15) 기술[1]을 세분화해서 나누지 못하면 지나치게 애만쓰게 되고, 이는 기술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아이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잠시 멈추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고 실험해보면서, 다양한 접근 방식을 시도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애만 쓰다가 실패한다.

우리는 실력이 빨리 늘기를 원한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면 올바른 동작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배울 때는 애쓰는 것을 멈추고 이전에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시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대개 배움의 열쇠는 애쓰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명료하게 생각하는데 있다. 즉, 당신이 늘 하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배움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2]

(p24) 대부분의 교육 체계에서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 이 때 우리는 잔뜩 애만 쓰게 되고, 이것은 사실 배움의 과정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 물론 기계적인 반복연습으로 기술을 습득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런 방식은 목표만 의식할 뿐, 배움의 가장 근복적이고 핵심 요소인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해낼지’가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해날재’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초해 배움에 접근할 때,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때 우리는 기계적인 반복 훈련, 행위에 기초한 낡은 방식의 학습법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중략)

(p25) 뭔가를 배우다 난관에 봉착할 때면 우리는 대개 무엇을 해야하는지 묻지만,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문제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3]

1장. 배우는 법

새로운 배움의 방식 찾기 (p26~27)

조시의 글자 쓰기 문제[4]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하면 조시를 도울 수 있을까? 앞서 얘기했듯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교사들은 글자를 쓸 수 있는 능력에만 과도하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문제가 조시의 불필요한 긴장과 결부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단순한 해결방안을 제안해보았다. 조시에게 연필로 글자를 쓰게 하는 대신 크레용 몇 개를 주고 커다란 원을 그리게 했다. 잠시 뒤 나는 조시에게 긴장하거나 애쓰지 않는 한에서 원을 점점 작게 만들어보라고 얘기했다. 새로운 전략은 먹혀들었다. ‘쓰는’ 대신 ‘그리게’ 함으로써, 조시는 긴장하며 글을 쓰는 것을 멈추었고 스스로를 옥죄지 않고도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조시가 평소 무언가를 하는 방식의 대안을 찾음으로써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다. 배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행위 패턴, 긴장, 나쁜 습관들은 바꾸지 않고 애만 쓰다 보니 꽉 막힌 상태에 처한다는 것이다. 즉, 더 잘하려 애쓰는 것이 오히려 배움에는 방해가 된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애쓰기 보다 뭔가 다른 것을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려워보이는 것도 쉽게 해낼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의 배움은 단순해 보이지만, 다루기 어려운 문제에 접근하는 기본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만으로 조시의 문제를 전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글자쓰기의 어려움은 사실 조시가 가진 본래의 문제가 부분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과 갈망은 종종 우리를 꽉 막힌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본능적으로 ‘애쓰기’만 하는 것은 배우는 능력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만 작동시키기 쉽다. 오히려 주의를 전환해, 자신도 모르게 작동하는 나쁜 습관들을 우회함으로써, 과제를 대할 때 나오는 자동반응을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는 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윌에게 익숙한 ‘애쓰기’의 대안이자 해결책이 될 것이다. 이런 전환은 옳은 것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잊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목표에 이르는 법을 생각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배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5]

(중략)

과제를 다루기 쉽게 만들기(p31)

위의 사례들에서 우리는 종종 숙달하고자 하는 활동과 관계있는 다른 활동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로운 반응이나 행동을 긍정적인 것으로 대체할 때, 우리는 교정하려 애쓰기보다 가볍게 문제를 우회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좋은 가르침의 근본 원리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을 잘 관찰하는 교사들은 기본적으로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누군가 글자쓰기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림을 그리게 하고, 말하기에 문제가 있다면 노래를 부르게 하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길 겁낸다면 유사한 다른 활동을 해보게 하거나 관련된 활동 중 두려움을 덜 느끼는 것을 해보게 하는 것이다.[6]

배움에 실패하기 위한 무의식적 전략들(p37~39)[7]

실패는 학습된 행동이다. 우리는 흔히 어렵게 느껴졌던 무언가를 배우려 할 때 내심 자신은 배울 수 없을 거라는 비밀스런 확신을 품고 배움에 두 발 전체를 담가 시도해보지 않는다. 이후 실패하면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는 데 내심 만족해한다.

이런 행동 전략 중 하나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배움에 적절한 환경에서 새로운 방법들을 적용해보는 대신 우리는 스스로를 낡고 익숙한 상황에 처박아두고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내심 이것이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예상대로 곧 우리는 실패하고, 이것을 자신에게 해낼 능력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로 삼는다. 때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발가락조차 담가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에게 시도해보았냐고 물으면 우리는 사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진정 애썼노라 답하곤 한다.

이 실패 전략의 다른 버전은 도중에 게임의 규칙을 바꿈으로써 실패할 구실을 마련해놓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자신이 얼마나 배움에 관심이 있는지 얘기하던 한 한색을 만난 적이 있다. 이 학생은 열심히 노력하고,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계속해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다. 하지만 20분 정도 지나면 자꾸만 짜증나고 좌절된 상태로 무너져버리곤 했다. 나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에게 학습 장애가 있거나 내가 발견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내가 제시한 연습을 하는 학생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그녀는 몇 분이 지나자 다른 걸 해보기로 마음을 바꾸었고, 곧 다시 산만해져서는 세번째 과제로 넘어갔다. 20분정도 지나자 그녀는 이 연습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왜 이학생이 계속해서 분투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과제가 주어지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이 과연 향상될 수 있을지 염려하느라 그 과제를 계속 붙들고 있기보다는 중간의 다음 수준의 과제로 넘어가버리거나 그 날의 연습에 다른 과제를 섞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은 긍정적인 학습경험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문제를 놓쳐버리고 혼란스럽고 불만족스러운 느낌만 남긴 채 연습을 마치게 된다. 이 학생은 처음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더라도 중간에 자신에게 새로운 목표를 부여하고 소화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떠안음으로써 좌절감만 맛보곤 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계속 더 많은 짐만 떠안거나 명료하지 못한 목표로 작업하며 성취감을 맛보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배움에 실패하고 한다.

실패의 또 다른 전략은 부정적인 태도와 학습된 무기력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보라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에게 뭘 하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투덜댄다. 공감적인 교사는 학생이 왜 어떤 작업에 저항감을 느끼거나 분투하는지 얘기 나누면서 학생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을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한들 학생은 계속해서 허우적거리고 교사는 반복해서 설명하느라 애를 먹는다.

여기서의 진짜 문제는 이 학생에게 배움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습관이 배어 있다는 점이다. 교사는 학생의 불평을 해결해야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교사의 동정을 끌어내기 위해 불평하는 행위 그 자체다. 이는 배움에 해로운 태도다. 교사가 학생의 행동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다. 동정은 자신이 좀 모자라거나 어려움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만 강화시킨다.

학생이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사실 그의 태도가 학습된 행동이라는 것으르 교사는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어느 정도의 경험이 필요하다. 학생의 이런 두려움과 어려움은 스스로 해로운 습관을 깨트릴 때 사라진다. 학생이 교사의 동정을 유도해 자신의 문제에 주의를 쏟도록 아무리 애를 쓴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상황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교사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5장. 반응의 역할(p130~144)

1. 행위의 무의식적 요소

어깨와 등의 긴장 때문에 내게 도움을 청했던 조안의 사례로 돌아가 무의식적 행위의 문제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우리는 조안이 플루트를 들어올릴 때마다 어깨와 몸통, 다리를 불필요하게 긴장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조안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몸이 자연스럽게 기능하도록 머리와 몸통 사이의 균형을 다시 조율하여 몸 전체의 전반적인 긴장을 늦출 필요가 있었다. 다음 단계는 서거나 팔을 들어올리는 단순한 동작을 할 때도 이렇게 향상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

(중략)

조안은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게 자기 자신을 가만히 놔두는 대신 움찔거리며 도리어 자신이 없애고자 하는 긴장을 더 강화시키곤 했다.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있어보라고 다시 부탁했지만, 조안은 의자에서 계속 튀어오르듯 움직이며 이전처럼 행동했다. 조안은 자신의 행위를 거의 제어하지 못했으며 나를 도우려고 하다가 결국 내가 하지 말라고 한 행동을 해버리곤 했다.

(중략)

이번엔 조안더러 움직이기 전에 의자에서 일어서지 말고 몸의 무게 중심만 앞으로 살짝 기울여보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조안은 그렇게 했다. 여기에서 조안이 전과 다르게 움직인 이유는 무엇일까? 조안이 내게 더 도움이 되고 싶어했거나 이해력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내가 움직임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고, 조안이 이를 의식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다양한 활동에서 어떤 행위를 할 거라는 ‘생각’과 근육의 긴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팔을 이완 상태로 늘어뜨린 채 있게 한 뒤 내가 재빨리 팔을 들어올렸을 때 조안은 팔을 그대로 놔둘 수 있었지만 같은 동작을 두 번째 반복했을 때는 스스로 팔을 들어올리려는 충동을 자제하지 못했다. 이 차이는 뭘까? 처음에 조안은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고 그래서 내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는 내가 팔을 들어올릴 거라는 생각을 했고 이것이 의도하지 않게 스스로 팔을 움직이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2. 생각이 움직임으로

생각이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뭘 까? 왜 이 움직임은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나는 걸까? 어떤 동작을 할 때 우리는 마치 정신이 동작을 원하는 대로 지시할 수 있는 관리자라도 되는 양 스스로 행위 과정에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사실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생각에 반응하여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방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접시 하나를 닦은 뒤 물로 헹구고는 다른 접시로 손을 뻗는다. 각각의 움직임이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하나의 동작은 앞의 동작에 연달아서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매우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행위에 가깝다. 우리가 어떻게 손을 씻고, 이를 닦는지만 관찰해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율권과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 우리가 하는 일상의 수많은 행위들은 습관적인 판에 박힌 행동들이며, 이는 대개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난다.

3. 감각-운동 신경회로, 익숙한 습관

대부분의 행위는 자율적인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설정 되어있는 신경회로대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가 몸이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거나 향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앉아 있다 일어서는 단순한 움직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라. 물론 우리는 마음 먹은 대로 서거나 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행동을 온전히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행동을 일상의 습관과 다른 방식으로 하기로 결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당신이 평소 일어설 때 등을 구부정하게 하는 습관이 있다면, 이 습관이 작동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설 수 있을까. 자신 안에 내재된 생각-운동 신경회로에서는 이미 그 대안을 찾을 수 없다. 이 때 당신은 일어서려는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아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8]

(중략)

우리는 대개 정신이 몸에 지령을 전달하고 몸은 이 지령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동이 자유의지를 통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이 움직임을 일으키는 방식은 좋든 싫든 이미 형성된 신경회로에 의해 습관화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가 행동이 일어나는 방식을 바꾸려 할 대 우리는 이미 형성된 특정 감각-운동의 협응 방식, 다른 말로는 습관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4. 익숙한 노력이 아닌, 의식적인 연습(p137)

음계 하나를 연주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한 행위를 할 때는 그 결과를 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행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 완벽한 제어 능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은 환상이다. 대단한 손재주가 필요한 작업을 해보라거나 복잡한 음계들을 빠르게 연주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우리는 이를 수행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경우 손은 건반이 아니라 어떤 건반을 연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반응해야 하고, 또한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만약 곡을 연주하려는 생각이 비효율적이며 통제되지 않는 움직임 패턴을 일으킨다면 손은 악보를 연주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복합적인 작업 앞에서 그저 습관적으로 반응한다면 원하는 결과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가 오히려 기술 수행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은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는 노력을 되풀이하다 보면 결국 어려운 악절도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될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사실 연주한다는 생각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일 뿐이다. 이 반응 패턴에 비효율적인 움직임이 섞여있다거나 생각과 동작 사이에 필요한 협응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불완전한 방식으로 피아노를 연습하게 될 것이다. 음계를 제대로 연주하겠다는 선의의 노력이 오히려 지성적인 연습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5. 낡은 생각과 습관적인 행동의 결합 깨기(p138)[9]

그렇다면 자동반응을 일으키는 이 결합 관계를 어떻게 깰 수 있을까? 등을 구부정하게 만들지 않고 일어서는 사례로 돌아가보자. 여기에서 학생은 자신의 움직임을 특정 방식으로 제어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등을 구부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포함해 그 어떤 의도도 생각-운동 반응을 유발하기 때문에 학생은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날 때 우선 움직이는 것을 감가야만 한다. 그 뒤 습관적인 행위와 새로운 방식의 행동을 뒤섞지 않으면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이렇게 할 수 있게 도우려면 교사는 어떤 행동을 결과와 직접 결부되어 있지 않은 세부 단계들로 나누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이 행동의 구성 요소에 온전히 주의를 집중하게 하고, 목표와 결과를 생각하느라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자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1)몸의 무게가 발에 전달될 때까지 고관절을 앞으로 접으며 (2)몸의 무게를 발바닥으로 전달하면서 일어서는 행위로 나눌 수 있다. 한번에 한단계씩 밟아가면 일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학생은 고관절을 앞쪽으로 회전시키는 움직임에 평소 일어서려할 때 일어나는 습관적인 반응들을 뒤섞어버릴 것이다. 이는 대개 학생이(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과에 신경을 쓰거나 또는 ‘제대로 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학생은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런 습관에는 우리가 목표에 집중하지 않으면 성취 동기를 잃게 될 거라는 불안이 깔려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편에 있다. 교사는 학생에게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실패의 보증수표임을 알려줘야 한다. 학생은 결과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에 오롯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과정’을 신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학생은 무엇을 ‘제대로’하는 것에 대해서는 덜 걱정하게 되고, 성취를 돕는 요소에 더 온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10]

일어서는 움직임과 연결짓지 않으면서 그저 고관절 앞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첫 단계를 마스터하게 되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도 다 일서설 때까지 평소 습관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던 움직임을 뒤섞지 않는다는 원리를 고수한다. 이렇게 과정에 주의를 기울일 때 일어서는 동작은 자연스레 일어날 뿐이다. 이제 학생은 매사 목표에 신경 쓰지 않아도 이를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신이 밟아가는 과정이 목표에 비해 더 흥미로운 대상이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습관적인 동작을 유발하는 낡은 생각들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지금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기술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6. 습관적인 ‘반응’에서 의식적인 ‘행동’으로[11]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다시 요약해보자. 생각-운동이란 생각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다. 이 습관적 반응으로 일어난 동작의 결과가 목표와 부합하는 한 우리는 이 과정을 다시 점검해볼 이유가 없다. 하지만 복합적인 기술을 터득해야 하거나 해로운 행동 패턴을 바꾸어야할 때 생각-운동은 우리를 제한하는 요소가 되기에, 우리는 더 의식적으로 이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자동반응으로 일어나는 습관적 반응이 우리를 가두는 덫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우리는 근육을 단련하거나 자신의 동작을 특정 방식으로 조절하면 이것이 새로운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애씀은 오히려 자신이 극복하려는 바로 그 습관만 부추길 뿐이다. 심지어 다르게 움직이려는 생각조차도 실패를 유발한다. 무언가를 하려는 생각이(심지어 뭔가 새로운 것을 한다는 생각도) 낡은 생각-운동 반응을 촉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애쓰기만 해서는 결국 자신이 변화시키려 하는 그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행위와 결부된 긴장 패턴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운동 반응을 더 잘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생각-운동은 생각과 근육이 함께 작동해 일어나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실 우리가 생각-운동에 관심을 두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기술 수행을 방해하는 해로운 긴장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 긴장이 없으면 불필요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거나 최소한 이전처럼 움직이지는 않게 된다. 그래서 근육의 긴장을 자각하고 예방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동작을 더 잘 제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근육의 긴장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습관적인 반응을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위를 하려는 생각은 다시 우리 안의 낡은 운동 패턴을 작동시킬 것이다. 하지만 근육계가 더 조화로운 상태가 되면 우리는 생각이 동작으로 이어질 때의 긴장 패턴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근육의 향상된 협응 상태가 생각이 잘못된 움직임을 유발하는 순간을 관찰할 수 있는 자각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반응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이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생각에 의한 습관적인 반응을 더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우리가 대체로 자신 안에서 무엇이 습관적인 반응을 유발하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로 팔을 들어올리거나 걸음걸이에 주의를 기울이곤 하지만 그 동작에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이 필요한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생각한다. 그리고 의식에서 떠돌아다니는 생각들에 반응한 결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행위가 일어나버린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습관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이 그 행위를 유발했는지 알지 못한다. 생각-운동의 연쇄작용, 즉 생각이 운동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 무지한 것이다.

우리는 근육의 운동감각 자각(kinesthetic awareness) 능력을 통해 이런 경향을 극복할 수 있다. 행위와 결부된 근육의 활동을 자각하게 될 때 이 근감각이 주는 피드백은 생각이 언제 작동을 시작했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 우리는 습관적 반응들을 더 의식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의 행위를 더 잘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무의식적 작용으로 일어나는지 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자율성에 대해 갖고 있던 주관적인 느낌이 몹시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 행위가 시작되는 근육의 긴장에 근감각이 깨어 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인 과정을 의식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기술 수행에 더 큰 제어력을 갖게 된다.

(중략)

여기서 움직임에 대한 자각이 기술을 습득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동 기능이 발달해 복잡한 활동도 거의 본능적으로 해낼 수 있다. 어떤 음악가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접해 동물들처럼 거의 본능 수준에서 학습할 수 있었기에 높은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운동기능은 습관이나 긴장 등에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학습에 끈덕지게 지속되는 문제를 극복하려면 때로는 자각을 통해 자신의 움직임을 더 의식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나가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 나아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바꾸고 싶다는 욕망은 오히려 습관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몸-행동 (ex. 중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습관적인 행동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를 이룬 자신의 ‘결과’가 아니라 매순간 자신의 ‘과정’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의식적으로!)

예를 들어, 억압의 상대와 마주친 ‘내’가 이번에는 이겨야한다, 물리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 잡혀 예전에 억압을 물리치려 했지만 좌절했던 말들과 행동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선 그런 욕망을 내려놓아서, 나를 더 조화로운 상태, 즉 긴장을 내려놓은 상태로 그 대상을 직면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전의 습관에 빠지지 않으면서 대처할 수 있는지 보아야합니다(악순환을 깨야합니다). 처음엔 물론 이런 습관을 제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향상되면 이를 알아차리게 되고, 이런 변화는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1] (쏭이 쓴 각주)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은 피아노연주, 테니스 치기, 노래 부르기 등과 같이 정신과 몸을 활용하여 장기간의 훈련과 배움이 필요한 인간의 행위들을 말한다.

[2] (쏭이 쓴 각주) 억압자에 대해 대처하는 상황극을 해본적이 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반박하기 어려웠다. 반복되는 상황과 대화가 나타날 뿐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시도도 ‘세분화’해서 연습해보면 어떨까.

[3] (쏭이 쓴 각 주)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하는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나 자신을 중심으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지 않다면 애는 쓰지만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4] (쏭이 쓴 각 주) 학교에서 글을 쓸 때마다 긴장하고 글씨도 알아볼 수 없기 어려운 상황. 담당 교사들이 글씨연습을 더 열심히 하도록 부추겼지만 개선되지는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상황임.

[5] (쏭이 쓴 각주) 나와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단히도 애써왔다. 하지만 정작 반복되는 나와 사회 속에서 회의를 느낄 때도 있다. 이 때 우회적으로, 주의를 전환해 반복되는 자동반응들을 바꾸는 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상징적인 신체의 대화가 그런 우회적인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6] (쏭이 쓴 각주) theatre for living 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그래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합쳐져서 자신의 이야기인 듯 아닌 듯 만들어진다. 이런 것도 어쩌면 자신의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이 아닐까?

[7] (쏭이 쓴 각주) 워크숍을 진행하다보면 가이드라인을 스스로 깨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한 시도를 거부하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예를 들어, 조각상 모습을 해야하는 상황 중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떤다든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겉도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노출을 차단 한다든지, 뭘 하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든지.. 물론, 가이드라인 자체가 명확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가이드라인에 대한 이해도와 준비되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여러 요인 중에서 이 문단은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내적 요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글로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시도를 거부하는 이유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우리 뼛속까지 스며있는 관념 때문에 생긴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p52).

[8] (쏭이 쓴 각주) 사유에 있어서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그 취지와 원리와 비슷한 듯..

[9] (쏭이 쓴 각주) 사회변화라는 큰 틀에서도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는 점에서 시민참여연극의 기능을 볼 수 있고, 개인의 변화라는 점에서도 행동과 생각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몸놀이를 통한 새로운 움직임이 역으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점에서 참조가 될 수 있다.

[10] (쏭이 쓴 각주) 디자인씽킹에서 단계를 뛰어넘어 결과에 대한 솔루션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유사함.

[11] (쏭이 쓴 각주) 이는 개인의 움직임에 관한 글이지만, 여기서 나온 일련의 행동 변화과정을 개인의 움직임들이 모인 하나의 사회 현상의 변화 과정에 접목해보아도 의미가 연결되는 듯 하다.

이론이야기_배우는법을_배우기.docx 32.2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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