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시스(praxis)란 성찰에 기반을 둔 행동이다(p109).
하지만 프락시스가 성찰을 전 단계로 하고 행동을 후속 단계로 하는 식의
이분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동과 성찰은 동시에 일어난다(p157).
-성찰의 방법으로서 연극과 연구-
프락시스가 가능하려면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보는 행위라면 연극에서 무대 위의 배우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시키는 것도 성찰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구의 목적이 어떤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이유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성찰의 한 방법이될 수 있을 것이다.
-성찰의 이유(기능)-
그렇다면 성찰은 왜 하는 걸까? 보통 나는 어떨 때 성찰을 하는가? 무언가 답답할 때. 다시 그런 상황을 겪고 싶거나 발생시키고 싶지않을 때. 다시 한번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라며 돌아본다. 즉, 변화하고 싶어서 성찰한다.
억압자-피억압자 모순은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생겨나므로
이 모순의 해결은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억압자임을 깨달은 개인이나 피억압자
모두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억압을 낳는 구체적 상황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p63).
그렇다면 성찰이 개인 단위로 이루어지거나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개인과 타인이 함께 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성찰의 주체-
개인(나)------------커뮤니티(개인+타인)----------------타인(너)
대화적인 '나'는 자신의 존재를 불러내는 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안다 .
또한 자신의 존재를 불러내는 '당신'이 또 다른 '나'를 구성하며,
그 '나'의 안에는 또 다른 '당신'이 있음을 안다.
이렇게 해서 '나'와 '당신'은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두 개의 '당신'이 되고
이 '당신'은 또 두 개의 '나'가 된다.(p203)
내 안에 타인이 있고, 타인 속에 내가 있음을 인식하여 서로 협동하게 되지 않을까? 만약 타인으로서 어떤 개인(들)과 함께 성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타인 중에 연구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시민참여연구자'가 아닐까?
참된혁명은 비인간화 상태를 낳는 현실의 변혁을 시도한다.
그 현실에서 득을 보는 사람은 그 변혁을 수행할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독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부와 함께 달성해야하는 과제다.
그러나 이 진리는 근본적으로 결과적이다.
다시 말해 지도부가 민중과의친교를 통해 체화해야하는 진리다.
친교를 통해 양 집단은 함께 나아가게 되며,
지도부는 독단을 피하고 민중의 프락시스와 함께
자신들의 프락시스를 순수하게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p159)
사회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시민참여연구자'를 위에 나와 있는 혁명 지도부로 볼 수 있다면 연구자는 커뮤니티(민중)와의 친교를 통한 프락시스(성찰+행동)를 해야할 것이다. 친교를 쌓는 방법으로서 연극적 방법의 유용성이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억압적문화활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제를 총체성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국부적인 것만 강조한다는 점이다.
‘공동체발전’ 계획에서는 대개 한 지역을 작은 ‘현지 공동체’들로 분할하고
그 공동체들을 나름의 전체로서,
혹은 다른 전체(지방, 지역 등등)의 일부로서고찰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외는 더욱 심화된다.
이렇게 민중이소외될수록 민중을 분할하고
그 분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한층 쉬워진다.(p172)
위에 따르면, 커뮤니티 단위로 프락시스를 할 때 유의해야할 점은 총체성을 잃지 말아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연구’의 유용성이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커뮤니티 단위의 성찰 도구로서 '시민참여연구'가 이루어지고, '시민참여연구'의 수단으로써 '시민참여연극' 활동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